[고양신문] 나는 일기를 쓴다. 기억할 만한 꿈을 꾸면 꿈 일기를 쓰고 그렇지 않으면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를 쓴다. 마땅히 쓸거리가 없으면 날짜만 쓰고 넘어가기도 한다.

일기는 대체로 아침에 쓴다. 남들은 하루를 정리하는 의미로 저녁에 쓴다지만, 일기를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에 대한 관찰이자 삶의 기록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어 총명하고 명료한 상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침은 하루 중에서 제일 머릿속이 깨끗하고, 단순하고, 생각을 끌고 가는 힘 또한 넉넉한 시간이다. 미뤄두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 불편했던 감정이나 관계들,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모호함과 망설여졌던 어제의 시간들이 아직은 올라오지 않고 오늘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다. 더불어 아침 시간에 쓰는 일기는 감정이 나대거나 앞서지 않고 제삼자의 관점에서 나와 내 주변의 상황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집에서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모두가 나가고 혼자 집에 있으면 여유롭고 우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쓸데없이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거나 보이지 않던 쌓인 먼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심코 잡은 TV 리모컨이 오전 시간을 통째로 버리게 하는 일도 다반사다. 의지와 이성 보다는 본능과 습관이 왜 그리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8시 30분을 전후해서 무조건 집을 나온다. 조용한 카페나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일기를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일기를 쓰면 가져온 책을 읽게 되고 책 읽기가 더디어질 때쯤 글을 쓰게 된다. 

일기는 연필로 쓴다. 카톡이나 메일 그리고 대부분 글은 자판기를 두들겨 쓰지만 일기만은 연필로 쓴다. 하얀 종이와 그 위의 매끄러운 느낌, 그리고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다. 연필을 깎고 필통에 넣는 일련의 과정들이 내가 ‘공부 잘하는 모범생’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면서 기분도 좋아진다(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노트북 자판기는 생각을 복사하듯 빠르게 화면 위에 그 모습을 보여준다. 지우기는 한 번에 가능하고 다시 불러들이고 싶으면 언제라도 단축키 하나만 누르면 가능하다. 그러나 연필은 생각을 따라갈 수 없다. 생각은 앞서가다가도 잠시 멈추어 종이 위에 마침표가 찍혀지길 기다려야 한다. 틀린 곳을 지우려면 지우개를 꺼내 들고 지워야 할 말과 글을 한 번 더 보게 한다. 지워진 곳 또한 흔적이 남는다. 다시 되돌릴 수는 있지만 아무 일도 없던 처음처럼 되진 않는다. 연필이 생각의 손을 잡고 여기 이곳에 잠시 머물자고 하는 것 같다. 생각이 느려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도 멈추고 현실과 동떨어지던 일도 줄어들고 과장되고 확대되어 쌓였던 오해들도 멈춰지고 무심히 지나쳤던 소소한 감정들도 놓치지 않게 된다.

가끔 지난 일기를 본다. 가슴에 담아 둔 것은 병이 될 수 있다. 속으로만 삭이던 어머니의 화병처럼. 말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은 반 정도는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 반이 나에게는 일기 쓰기이다. 말을 하면 시원하지만, 허공에 흩어져 버려 남아 있지 않아 가끔은 허무하다. 한 달 전, 일 년 전 일기를 보면 그 속에 나의 고민의 과정이 있고 감정이 있고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석과 해결방안이 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라며 자랑스러울 때도 있고, ‘내가 너무 옹졸했나?’라며 부끄러울 때도 있다. 예전에 비해 너그러워진 나를 보며 뿌듯하기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가슴을 누르던 돌덩이가 지금 나에게는 주머니 속 구슬처럼 귀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하게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일기장을 사러 문구점에 자주 간다. 문구점 탐방 경로는 정해져 있다. 마음에 드는 연필 한두 개와 책 읽을 때 밑줄 그을 형광펜을 사고, 재미 삼아 붙일 스티커와 장난감들을 둘러본다. 나는 가장 얇은 공책을 고른다. 두꺼운 공책을 다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한두 달 쓰고 새 공책을 사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서이다. 문구점을 한 바퀴 돌고 나설 즈음 또 다른 쇼핑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일기쓰기는 아마도 보약이자 힐링프로그램이 틀림없다.

노미화 건강넷 심리상담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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